블루아카 소설 (Pixiv)/단편

만취한 선생과 나기사쨩

무작 2025. 5. 2. 10:00

작품 링크 : https://www.pixiv.net/novel/show.php?id=24663845

 

작가 : John先生


작가의 말 : 선생님은 취해도 선생님이시네요.


만취한 선생과 나기사쨩

 

새하얀 종이에 한 줄로 그어진 밑줄을 따라, 매끈한 펜촉을 움직였습니다.
키리후지 나기사――몇 번이나 봤는지 모를 글자가 검고 선명하게 빛났습니다.
이어서 도장을 인주에 찍어 눌렀습니다.
싱그러운 잉크의 검은색은, 그러나 번짐 하나 없이 그 자리에 자리 잡았습니다.

서명, 날인, 서명, 날인, 서명, 단조로운 반복.
그런 재미없는 사무 작업이 일단락되어 시계를 보니, 바늘은 여덟 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홀로 남겨진 집무실에서 천장을 올려다보며,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목을 돌렸습니다.

주황색 조명에 물든 천장의 구석구석으로 시선을 옮기고, 입술의 작은 틈으로 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리고 마른 입술을 축이듯, 컵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습니다.
차가움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기계적으로 남은 것을 단숨에 마시고 접시 위에 내려놓았습니다.
양손을 가슴 앞에서 깍지 끼고 살짝 등을 젖히며 눈을 감으니 쌓인 피로가 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키잉, 하고 높은 소리가 귓속에서 들리고, 그 후 발소리 하나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한 박자 쉬고 눈꺼풀을 뜨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세련된 색감의 서재 책상, 이것도 평소와 같았습니다.


책상 위에 엎드려 잠든 스마트폰.
무심코 손에 잡으려 들어 올린 손가락 끝이, 직전에 망설였습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세계.
퇴폐적이고, 익숙한 편안함의, 외로운 안식처.
그것은 녹아내리는 듯한 부드러움으로 저를 얽어매고, 꼼짝도 못 하게 합니다.

막연한 시선에 노려진 손가락 끝은 희미하게 배를 저었습니다.
흔들흔들, 스르륵스르륵, 희미하게 윤곽을 깜빡이며 반복합니다.
점점 그림자가 짙어지는 시야의 중앙을 차지하고는, 단조로운 리듬을 반복합니다.
소리도, 빛도 없이, 흔들림만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답답함도 걱정도 존재하지 않는 흔들림, 저는 그것이 그렇게 싫지는 않았습니다.

마침 손목과 팔꿈치 중간쯤, 책상에 놓여 있던 부분이 살짝 떨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시선이 손가락 끝에서 휴대 단말기의 뒷면으로 쏟아집니다.


감지한 것은 진동 알림.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제가 특별히 등록해 둔 시종 중 한 명인가요, 아니면 허물없는 옛 친구인가요, 코를 찌르는 말투만 하는 얄미운 학우인가요, 평범하고 사랑스러운 후배인가요, 이제 소식조차 끊긴 가족이나 지인인가요.
결코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럴 텐데, 왠지 인정하기 귀찮아져 단말기에서 눈을 뗐습니다.

등받이에 체중을 맡기고 천장을 올려다보니, 기다리고 있던 샹들리에의 반짝임에 눈이 빨려 들어갔습니다.
시대에 뒤떨어진 구식 조명 기구.
안전성도 편리성도 밀레니엄제 LED에는 훨씬 못 미치지만,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아 놓지 않는 기품으로 선택된 주옥같은 일품입니다.

저는 그것이 싫지 않습니다.
쌓아 올린 역사가 이끌어내는 고결한 문화 규범, 저와는 달리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특유의 품위를 쌓는 데 성공했습니다.
모든 것을 한 몸에 짊어지고도 여전히 사람을 끌어당기는 빛을 계속 발산합니다.
그것이 제가 지향해야 할 모습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눈앞에서 삐리릭 하고 전자음이 울렸습니다.
만일 놓치는 일이 없도록 설정해 둔, 유일하게 알림음이 다른 연락처.
그 주인은, 한때 저희의 몇 겹으로 추하게 뒤틀린 실타래의 매듭을, 끊어내지 않고 따뜻하게 풀어주셨습니다.
그것은 구름을 잡는 듯한 몽상을 형태로 보여준, 그야말로 기적이라고 해도 무방한 선명한 솜씨.
그리고, 그의 흔들리지 않는 각오가 지금도 여전히, 제 머릿속에 강렬하게 새겨져 떠나지 않습니다.

그를 동경하고, 자신의 미숙함을 깨닫고, 연모하고.
그런데도 저는 아직 과거의 저를 어딘가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례 회의에서 비판의 화살을 맞을 때마다, SNS에서 있지도 않은 일을 재미있게 늘어놓는 것을 볼 때마다, 지긋지긋하면서도 찻잎의 브랜드를 바꾸는 것이 귀찮아서, 입에 대고 어제와 같은 맛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빙글빙글, 어중간한 초조함만이 제동을 잃고 공허한 회전을 계속합니다.


가슴의 술렁임에 재촉받아 사고의 바다에서 급부상하여, 휴대폰에 손을 뻗었습니다.
디스플레이에 표시된 것은, 한 건의 메시지.

발신처, 연방수사부 샬레.

이렇게 늦게, 샬레 명의로 연락이.
솔직히, 개인적인 연락처로부터의 메시지가 아니라는 것에 어깨를 늘어뜨렸습니다.
즉, 어떤 업무상의 통지, 결국 티파티 앞으로 쓰인 글자의 나열일 뿐.
거기에는 저나 선생님 같은 사소한 일이 존재할 여지도 없는, 답답하고 즉물적인 평평한 말들만이 늘어서 있습니다.

단조로운, 지루한 일상의 한 페이지. 그럴 터였습니다.
메일함을 열고 각진 문자열에 눈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내용에 아연실색했습니다.



【제목:유리조노 세이아다. 시급히 구조를 요청한다.
발신:연방수사부 샬레
날짜:4/30
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
가급적 신속하게 샬레로 와 주길 바란다, 선생이 나를 놓아주지 않ㄴbdr메・】



그것은 눈을 의심할 정도로 기상천외한 내용으로, 왜 샬레 명의로 나에게 연락이 왔는지, 세이아 씨가 예측 불가능한 사태에 빠져 있는지, 선생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는 구절은 무슨 뜻인지, 의문은 끊임없이 솟아나고, 소용돌이치며, 점점 더 저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세이아 씨는 분명 아침부터 당번으로 샬레에 갔을 터였습니다.
들뜬 목소리로 말하며 몸단장을 하는 그녀를 쌀쌀맞게 배웅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생각해 보니 그 세이아 씨가 돌아왔다는 소식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저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겠지, 그리고 그 사태는 제 손을 빌릴 필요가 있을 정도로 난항 중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있다면 그다지 문제는 없을 것 같기도 한데, 설마 그의 손으로도 벅찰 정도로 문제가 커진 것일까요.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더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저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마중 나올 차를 부르고, 가볍게 몸단장을 하고 학생회 집무실을 나섰습니다.





「운전 수고하셨습니다. 돌아갈 때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빠른 말투로 그렇게 던지고, 뒤로 후부 좌석 문을 닫았습니다.
앞을 보니, 맑은 밤하늘의 남색에 사무실 불빛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꽃샘추위의 마른 공기를 헤치고, 빠른 걸음으로 입구로 들어갔습니다.

최소한의 조명 기구만 켜져 있던 로비는 제 존재를 감지했는지, 금세 환하게 빛났습니다.
무기질적인 은색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쿵 하고 중력이 강해지는 것을 느끼고, 쿵쿵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듯 심호흡을 한 번, 그리고 거울을 향해 등을 꼿꼿이 폈습니다.

그러는 사이 도착을 알리는 벨 소리가 울리고, 열린 문에서는 맑고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쳤습니다.
고요한 사무실에서 걸음을 옮겨, 이윽고 집무실 앞에서 자동문과 마주했습니다.
서리 낀 유리 너머의 불은 켜져 있었고, 그것으로 보아 두 사람은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희미한 숨결의 기척이 느껴집니다.

이제 투명한 판 하나만 가로막힌 여기까지 왔는데도, 막판에 저는 갑자기 덜컥 겁이 났습니다.
지금까지 세이아 씨가 저에게 구조를 요청한 적은 종종 있었지만, 그래도 대부분 사소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샬레의 선생님 손으로도 벅찬 것 같습니다, 제가 어떻게 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러운 영역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하고 사색을 거듭했지만, 마땅한 생각은 떠오르지 않아, 용기를 내어 직접 확인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꿀꺽 침을 삼키고, 허리에 찬 애총을 확인하고 인터폰을 눌렀습니다.

「선생님, 키리후지입니다. 시간 괜찮으실까요?」

대답은 없었습니다.
다시 한번 초인종을 누를까, 아니면 허락 없이 들어가 버릴까 망설이던 중, 유리 너머로 어딘가 들뜬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기사인가, 들어와 줘! 빨리!」

목소리의 주인은 세이아 씨겠죠.
평소 냉정 침착한 그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살기 어린 울림이 있었습니다.
저는 허리의 홀스터에 손을 얹으며, 실내로 들어섰습니다.


자동문이 열리고, 거기서 눈에 들어온 것은, 선생님이 평소 일을 하시는 책상 의자 위에서, 선생님 무릎 위에 앉혀져 뒤에서 껴안겨 있는 그녀의 작은 몸.
그녀는 선생님 몸에 쏙 들어가는 형태로 몸을 굳히고 있었습니다.
순간, 눈앞의 정보를 파악하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나기사인가! 드디어 와 줬구나, 그럼 바로 선생님을 떼어내는 것을 도와줘!」

빠른 말투로 쏘아붙이는 그녀의 붉어진 얼굴의 신기함 때문인지, 아니면 이 바보 같은 상황에서 저의 우려가 기우였다는 것에 안도했기 때문인지, 무심코 입술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습니다.
어깨에서 힘이 훅 빠지고, 총에 얹혀 있던 손을 살짝 뗐습니다.

「정말, 갑자기 샬레에서 연락이 와서 급하게 와 봤더니, 두 분 다 뭘 하고 계신 건가요?」
「그런 게 아니다! 이건 선생님이 갑자기 저질러서…」

허둥대는 그녀를 곁눈질하며 그녀의 등을 껴안고 있는 선생님의 얼굴을 보니, 그도 세이아 씨만큼은 아니었지만 뺨을 살짝 붉히고, 풀어진 눈꼬리로 이쪽을 싱글벙글 엿보고 있습니다.
쑥스러워하기보다는, 술이라도 마신 것 같았습니다.
깜짝 놀라 단서를 잡으려고 시선을 헤매다, 두 사람 앞에 우뚝 솟은 책상에 눈이 멈췄습니다.
홍차 컵 옆에, 초콜릿 과자 포장이 굴러다니고 있습니다.
포장에는 꿀색 알파벳으로 상품명이 쓰여 있다, 이건 혹시…

「세이아 씨, 설마 선생님께 술이 든 초콜릿을 먹이신 건가요?!」
「아아, 그렇다만…」
「무슨 짓을 하신 건가요!? 선생님은 한 방울도 못 마실 정도로 알코올에 내성이 없으시다구요!」
「뭐, 과연. 어쩐지 선생님이 술을 마시는 걸 본 적이 없더라니」
「뭘 냉정하게 분석하고 계신 건가요! 어쨌든 선생님에게서 떨어지세요!!」
「나도 그러고 싶지만, 아무래도 놓아주질 않아서… 햐아」

선생님이 코끝을 그녀의 부드러운 금발에 파묻었습니다.
놀란 그녀가 기묘한 소리를 질렀습니다.
뭐,, 얼마나 파렴치한… 부러운… 아니, 지금은 이 상황을 어떻게든 하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어쨌든, 선생님을 떼어낼게요! 세이아 씨도 좀 저항하세요!」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열렬한 포옹을 받고 있어서는 손발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염장 지르는 건가요!? 선생님도 이제 그만 세이아 씨를 풀어주세요!」

요염한 표정을 띤 삶은 문어 상태의 세이아 씨는 이제 의지가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직 그녀의 후두부에 얼굴을 대고 있는 선생님의 둥근 어깨를 잡고 흔듭니다.

「선생님, 선생님! 정신 차리세요!!」

하지만, 뜨겁게 달아오른 두꺼운 상체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키보토스의 학생들과 비교해서 완력이 뛰어난 편은 아니라고 들었기에, 이렇게까지 상대가 안 될 줄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최악의 경우 힘으로 떼어내면 된다고만 생각했던 안일함을 통감하고, 이건 제 손에도 벅찰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소름이 돋아 목덜미에 차가운 것이 기어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선생님이 웅얼웅얼 녹아내린 목소리를 냅니다.

「나기사도 놀아달라는 거야? 양손에 꽃이라 선생님 곤란하네~」
「얼빠진 소리 하지 마세요. 그리고 저'도'라니 무슨 뜻인가요?」
「정말, 부끄러워하긴. 사양하지 마~」
「사양 같은 거 안 해요! 됐으니까 세이아 씨를 놓아… 꺄악!」

갑자기, 선생님은 양팔의 구속을 풀고 세이아 씨를 풀어주더니 의자를 빙글 한 바퀴 돌려 이쪽으로 돌아섰습니다.
그의 촉촉한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팔이 등 뒤로 둘러져 있었고, 확실한 힘으로 끌어당겨져 앞으로 비틀거렸습니다.
허리를 내린 선생님의 그 가슴팍에 넘어진 꼴입니다.

반사적으로 밀어내고 자세를 바로잡으려 하지만, 그는 등 뒤에서 단단히 껴안고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잠시 밀고 당기기를 반복하는 동안, 너무나 부끄러워서 얼굴에 피가 확 쏠리는 것이 느껴져, 오히려 그의 몸 그늘에서 얼굴을 뗄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사방팔방에서 그의 체온이 전해져 와서, 마치 저라는 윤곽이 그에게 녹아 사라지는 듯한 비현실감이 있었습니다.
왠지 달콤한 꿈 같아요, 라고 한 번 느껴 버리자, 등을 움츠리게 하는 떨림도 스르륵 가라앉았습니다.
셔츠를 사이에 두고, 그의 심장 박동이 전해져 옵니다. 어쩌면 고막을 울리는 심장 박동은 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몸부림을 멈췄습니다.
저항할 의사가 사라진 것을 감지했는지, 그의 울퉁불퉁한 손바닥이 제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습니다.
그 리듬이 기분 좋아서, 하지만 어중간한 자세 때문에 비명을 지르는 허리가 안타까워서, 무게 중심을 잡듯이 넓은 어깨 너머로 의자 등받이를 잡고 끌어당겨, 두꺼운 가슴팍에 체중을 완전히 맡겼습니다.

부드러운 조임이 더욱 강해집니다.
거기에는 결코 답답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뿌리칠 수 있느냐 하면 그럴 수 없는, 본능적으로 안심이 되는 밀착감이 있었습니다.
머리가 멍해져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듯한, 아니면 생각하는 모든 것이 눈앞의 그에게 뒤덮여 가는 듯한 도취를 느꼈습니다.
언제나 머릿속 한구석에 스며들어 떠나지 않던 번민이 스르륵 머리에서 빠져나갔습니다.
꽤나 그리운 기억의 잔향이 훅 풍겼습니다.


「…확실히 도와달라고 말한 것은 나지만, 그렇게 싫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어떤가 싶네」

완전히 의식 밖이었던 그녀의 목소리에, 순식간에 현실로 되돌아왔습니다.
반사적으로 확 몸을 빼자, 이번 선생님은 순순히 풀어주었습니다.
황급히 입가를 가리고 시선을 옆으로 돌리니, 축축하게 젖은 눈동자를 이쪽으로 향하는 세이아 씨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무거운 공기가 감돌았습니다.
그녀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이 입꼬리를 움직이고, 이윽고 눈썹을 올리며 휙 눈을 돌리고, 중얼거렸습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록 할까」
「…그러네요」

그녀는 빙글 몸을 돌려, 기분 탓인지 어깨를 으쓱이며 출구 쪽으로 빠르게 멀어져 갔습니다.
왠지 기분이 안 좋아 보입니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난해한 말투와는 달리, 의외로 어린애 같은 면이 있는 것도 또한, 세이아 씨의 귀여운 점입니다.
따라 한 걸음 내딛다가, 앗 하고 생각나 뒤로 돌아, 선생님께 소란을 피워 죄송했습니다, 라고 머리를 숙였습니다.
선생님은 또 와, 라고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팔랑팔랑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럼 또, 라고 그에게 등을 돌리는 그 순간, 복도에서 풍겨온 차가운 바깥 공기가 훅 뺨을 스쳤습니다.

완전히 잊고 있던 우울한 기분이, 스르륵 사고에 스며듭니다.

오늘은, 꽤 밤이 깊어 버렸습니다.
분명 잠자리에 들 때쯤에는 시계는 자정을 넘었을 겁니다.
내일도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오늘보다 더 지루한 하루가 될 겁니다.
뭐, 할 수밖에, 없겠죠.
잿빛 한숨을 삼키고, 한 발 앞서 떠난 그녀의 뒤를 쫓습니다.



「기다려」


또렷한 목소리가, 집무실에서 발을 내딛기 직전, 등 뒤에서 끼어들었습니다.
동시에 소매를 당기는 힘을 느끼고, 돌아보니 거기에 배웅하러 선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여전히 달아오른 뺨은 그대로, 평소의 부드럽게 꿰뚫어 보는 듯한 눈이 저를 꿰뚫었습니다.
뼈마디가 굵은 손바닥이, 제 손가락에 겹쳐집니다.


「또 언제든 와」
「…그럴게요」

부드럽게 터진 눈동자에 옅게 미소 짓고 샬레를 떠났습니다.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혼자, 손가락 끝을 바라보았습니다.
따뜻해져 혈색이 좋아진 유연한 손가락이, 차가운 공기 속에서 태연하게 가슴을 펴고 있었습니다.

내일부터 또, 지루한 나날이 시작될 것입니다.
여전히 저는 완고하게 일을 양보하지 않고, 종종 미네 씨나 사쿠라코 씨들과 얼굴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격무에 시달려, 지친 몸을 질질 끌고 차가운 시트에 파고들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조만간 책상 램프라도 찾으러 갈까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독백 말투 고치기 귀찮네